1975년 어느 날, 한 여자는 꿈을 꾸었다.
달빛이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그 존재감을 발하는 도중, 서서히 어둠에 잡아먹혀 달빛과 어둠이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꿈. 달빛은 싸우다 싸우다 결국 핏빛으로 물들고, 어둠은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강렬한 빛이, 달빛은 그 빛을 집어삼키는 핏빛 어둠이 되어 끊임없이 싸우는 꿈.
여자는 뒤이어 아이를 가졌고, 1976년 1월 30일, 조금은 말랐지만 건강한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아이가 자라 생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게 되었을 때는, 1987년이었다.
옆집에 살았던 다정한 아저씨가 일터에서 다쳐오고 그 일터에서 쫒겨났을 때, 어렴풋이 기억났던 아주 어릴 때의 이야기가 가슴을 짓눌러왔다.
아저씨는 그만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아이는 옆집에 살던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아직도 기억해야만 했다.
1989년 8월, 북악산 근처 어느 대학교에서 한바탕 데모가 벌어져야만 했다. 북으로 청년을 보내고 나서, 그 청년이 북으로 갔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하지만 경찰은 굳건하게 대학 근처를 지키고 있었고, 한 단체의 선전국장을 맡았던 아이는 선택해야만 했다.
아이는 데모 몇 주 전부터 선배동지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미친 듯이 찍어내라고 지시했다. 아이가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절절한 호소문은 선배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고, 결국 그녀는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 선로 점거를 강행하여, 그 수많은 대오들이 대학 내로 진입할 수 있게 했던 그 날의 ' 북악대첩 ' 을 대성공으로 이끌었다.
대외적으로 나서기에는 이 사회가 아이를 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어려, 선배들의 공이라며 축배를 들고 경악을 했지만, 그 날 이후 아이에겐 몇 가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 전략의 지배자 " , " 북악대첩의 영웅 " , 그리고 " 전국민주중고등학생연합 1기 의장 대리 겸 2기 부의장 "
1991년 5월 20일 6시 42분, 아이를 데리고 같이 달리던 선배는 넘어지고 그 자리에서 곤봉과 방패와 군홧발들에 두들겨맞기 시작했다.
도주와 도움의 갈림길에서 아이는 선택해야 했고, 결국 도주를 선택한 아이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들겨맞아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한 그 순간, 아이는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아이가 격하게 울부짖었다. 아이는 끊임이 없을 듯이 울어대다가, 울어대다가, 마침내 눈에서 눈물이 아니라 피가 흘러나올 때까지 울었다. 그래도 아이의 울음은, 아니 절규는 끊임이 없었다.
울부짖음을 들은 시위대들의 시야는 일순간 새카매졌지만, 어느 하나 다친 시위대는 없었다. 시위대들의 시야가 점점 밝아지자 보인 것은 주저앉아 새하얀 머리색을 가진 채 눈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아이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에 고통스러워하는 곤봉과 방패와 군홧발들이었다.
그 날 이후 새로 얻은 수식어가 있었다. 전국민주중고등학생연합 2기 의장, 자랑스러운 해방꽃. 그리고 희생의 전리품, 핏빛의 이아란. 아이의 이름은 이제 온누리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지만, 그 날 그 선배를 죽인 자들은 그녀의 존재를 감추려고 했다. 너무나도 무서운 힘이었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꿈을 생각해냈다. 백설공주에 비견되는 칠흑같은 검은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고, 딸의 모습이 예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빛을 따라가 어둠을 밝히겠다는 모습과는 달리, 세상의 눈을 가리는 강렬한 빛을 집어삼키겠다는 그녀의 분노는 너무나도 치열하고 강렬했다.
독재자를 잡아쳐넣은 댓가는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 학살의 배후조종자를 잡아쳐넣은 댓가를 치르고 난 이후 이아란은 중앙대에 들어갔다. 96년 고대항쟁을 거쳐 이아란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의장이 되었고, 그녀는 또, 또 사람을 잃었다. 사람을 잃는 것은 더 이상 싫었다. 거리가 피로 물들고 이아란은 한 쪽 눈동자가 붉어지고, 91년의 그 날이 다시 오고, 아아, 이런 생이 어디에 있으랴!
그렇게 이아란은 한평생을 조직운동가로서 살아왔다. 비가 오면 비투사로, 눈이 오면 눈투사로, 해가 뜨면 해투사로, 달이 뜨면 달투사로, 변함이 없는 전사로서 그렇게 일생을 살아왔을 터이다, 아니 그렇게 그녀의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쳐가고 있다. 백발 단발은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있고, 뿔테안경을 쓰고 있으며, 매섭지만 작지 않은 두 검은 눈에서 보이는 청년시절을 관통한 그 굳건한 신념과 결의, 화려하게 치장하지는 않았지만 본 모습에서 풍기는 일종의 아우라는 결코 그녀가 혁명가로서, 전선운동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증명하리라.
그 이름 이 아란.
태어난 날 1976년 1월 30일.
성별 시스젠더 여성
170이 약간 넘는 키.
50 후반 대의 몸무게.
" 여리여리해보인다 " 며 방심하지 말 것, 현 대한민국 진보진영을 이끄는 핵심인사.
이를 악물며 아둥바둥 살아온 삶, 자조적인 태도와 가끔씩 트라우마에 삼켜지는 모습.
상당한 골초, 술은 찾아 마시지 않는 편.
가는 말이 곱지만 오는 말이 곱지 못하면 가는 말이 곱진 않으며, 왼쪽 목을 따라 6cm 정도의 자상 흉터.
평소에는 화장 등으로 가리는 듯.
백발단발, 뿔테안경 착용.
나이 어린 여성으로 패싱되는 경우가 잦아 초장부터 하대는 삼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진보세력 내 최상의 입지와 평판을 지니고 있음에도 나날이 혹사당하는 몸은 그녀의 투쟁에 잘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혹사시킬 뿐이다.
지키지 못한 자들에 대한 공포. 그 공포에 잠겨 선전국장 시절부터 담배로 살아온 삶.
왼쪽의 붉은 눈은 활성화될 때 드러나고, 평소에는 검은 눈이리라.
두 검은 눈으로는 거짓된 빛을 삼키는 어둠이 되고, 왼 쪽의 붉은 눈은 피로 얼룩진 원한을 달래어, 피로서 싸우리라.
흰머리오목눈이로 변할 수 있음.